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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말씀드렸듯이, 은사주의 운동의 여러 문제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반드시 다루어야 할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과도기 문제입니다. 현대 은사주의 운동을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살펴보는 시리즈 설교 중에서 오늘이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으로 인해서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일들은 반드시 하나님 말씀의 기준 앞에서 검증되어야 합니다.

최근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매우 잘 알려져 있고, 또 은사주의 운동 안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한 은사주의 단체가 이런 주장을 했답니다. 다섯 사람이 동일한 신적 계시를 받았다고 서로 동의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사탄의 사자들 중에서도 같은 계시에 동의하는 다섯 명쯤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다섯 사람이 동일하게 받은 계시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세상으로 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두 사람씩이 아니라 한 명은 로마 가톨릭, 한 명은 개신교, 이렇게 두 종교의 신자가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러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에는 이 밖에도 우려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시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 일치를 근거로 결정을 내리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는 사람과 교회의 전통을 진리로 믿는 사람이 하나의 목적 아래 함께 사역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일들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정한 자세와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로, 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은사주의 운동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되,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로 가져와서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계시, 성경 해석, 사도직의 특별함이라는 문제를 살펴보았고, 오늘 아침에는 네 번째 주제인 과도기 문제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을 구별하는 핵심 교리를 말씀드렸죠. 바로 사도행전 2장 4절에 이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은사주의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반드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만 초대교회가 경험했던 성령의 능력과 충만함을 받고, 초대교회가 나타냈던 기적을 지금도 경험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 2장 4절의 사건이 교회의 표준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고 그때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에,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방언을 동반한 성령의 임재가 사도행전에 몇 차례 더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경험이 그리스도인의 통상적인 신앙 경험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구원을 먼저 받고, 그다음에 방언을 동반한 성령의 능력과 충만을 받음으로써 특별한 능력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번째 은혜의 역사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지런히 간절하게 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결론은 단지 사도행전에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할 뿐입니다. 서신서 어디에도 그런 경험을 하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서신서는 물론이고 사도행전에도 그런 경험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명령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일어났으니 오늘날에도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날 거의 논의되지 않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사도행전에서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오늘날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고,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과연 내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살펴본 것처럼,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고요? 사도행전은 과도기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시대에 일어났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많은 사건들은 교회가 반드시 따라야 할 명령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사실로서 기록된 것일 뿐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말씀드렸듯이, 만약에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신앙 경험으로 받아들인다면, 매우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대로 재현될 수도 없고, 재현될 필요도 없고, 또 재현되어서도 안 되는 매우 다양한 사건들이 사도행전에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이 과도기의 성격을 가진 책이라는 사실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두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3장에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가 다시 제시되는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이 서원을 한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 모두 사도행전이 과도기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가 이미 세워졌는데도 3장에서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다시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두 시대가 서로 겹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새로운 시대, 혹은 경륜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실 때는, 한 시대가 갑자기 완전히 끝나고 곧바로 다음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겹치는 기간이 있습니다. 장차 이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될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사이에는 아마겟돈 이후의 정리가 진행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질서가 갖추어지는 과도기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도표를 그리면서 한 시대가 끝나는 지점에 선을 딱 긋듯이 그렇게 깔끔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다시 제시된 사건을 통해서 바로 이러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18장에서 유대인의 나실인 서원을 했다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었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신약의 진리와 새 언약의 모든 내용을 선포하도록 비밀의 경륜을 맡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 시대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과도기적 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제가 또 한 가지 말씀드린 것은, 초대교회가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을 갑자기 모두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는 처음에는 성전에서 모였고, 이방 지역으로 나아간 뒤에도 여전히 회당에서 모였습니다. 또 로마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이 특정한 날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렇게 하게 하라"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을 지키려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하게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정리되도록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죠. 오늘날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문제를 매우 큰 쟁점으로 삼지만, 당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문제로 걱정하지 말아라. 어떤 사람이 그날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주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아라. 또 아직도 음식 규례를 중요하게 여기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려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돼지고기를 내놓지 말아라."

이렇게 사도행전에, 그리고 로마서에서도, 초대교회가 유대교의 기본적인 문화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은 과도기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은 유대인이 하나님께서 이루고 계신 이 전환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유대교가 얼마나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여러 예를 통해서 살펴보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변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도 말씀드렸습니다.

자, 이제 사도행전의 과도기적 성격을 전체적으로 살펴본 후에, 사도행전 2장과 8장, 10장, 19장이 가진 의미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1절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은사주의자와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난 성령세례와 방언이 구원 이후에 일어나는 두 번째 경험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그 후의 어느 시점엔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난 그 능력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제자들은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들이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구요? 그 이유를 몇 가지 말씀을 통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어디서부터 볼까요? 누가복음 10장 20절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70인을 보내시면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죠. 이어서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제자들을 이미 하늘에 속한 시민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거듭난 사람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또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3절입니다. 역시 아직 십자가 이전이고, 당연히 오순절 이전의 일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 함께 보겠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예수님은 참된 가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열한 제자가 참된 가지이고, 유다는 거짓 가지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미 깨끗하다.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이미 깨끗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영적으로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는 사도행전 2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이미 믿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인정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사도들과 제자들, 저도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또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입니다.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구약의 구원, 그리스도의 사역을 미리 바라보며 은혜로 받는 구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21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순절주의자들은 제자들이 바로 이때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논리는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10장과 요한복음 15장은 제자들이 이미 구원받았다고 확인해 줍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처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다음 오순절주의자들은 오순절에 다시 한 번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번째 경험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을 주는 경험이고, 바로 이 능력이 사도행전에서 온 세상을 뒤흔드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성령을 받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이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이렇게 물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오순절에 이루실 일을 미리 약속하신 선언이었다고 확신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자리에서 실제로 성령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일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사실상 이렇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믿는 너희를 내가 보내는데 23절에서 말한 것처럼 너희가 죄와 의에 관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이므로, 나는 너희에게 내 성령을 주겠다." 그러나 실제로 성령을 받는 일은 아직 미래의 일입니다. 마치 우리가 이미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있지만, 그 시민권이 가져다줄 모든 영광은 장차 상속으로 받을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제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을 보십시오. 같은 장에서 몇 절만 더 내려가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드레가 지난 뒤에도 제자들이 여전히 그 방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여드레 전에 이미 성령을 받았다면, 여드레가 지난 시점에 여전히 그 방 안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또 요한복음 21장 4절을 보십시오.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그리고 12절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이런 주장을 합니다. 물론 결정적인 논거는 아닙니다. 참고 정도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것인데, 만일 제자들이 이미 성령을 받았다면 바닷가에서 조반을 드시는 예수님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4절처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물론 가능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증거만큼 강력하지는 않습니다. 더 강력한 증거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옵니다. 사실 5절부터 보는 게 좋겠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그들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14절에 가서도 한마음으로 기도하며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도행전 2장에 이르러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저는 성령님이 두 번 임하셨다고 볼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요한복음 20장에서 성령님이 실제로 임하셨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 그 사건이 십자가 이전이라고 말했다면 제가 정정하겠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이고 부활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장차 이루어질 일을 약속하신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사도행전 2장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때에 이르러서야 성령님이 임하시면 증인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또 하나 살펴볼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39절입니다. 어쩌면 가장 결정적인 논거일 것입니다. 37절부터 보겠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성령님이 오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겟세마네에서 드리셨던 기도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성령님이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으로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여 그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성령님께서 오실 수 있었고, 요한복음 7장 39절에 따르면 그 이전에는 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장차 이루어질 일을 약속하신 선언일 뿐입니다.

또 요한복음 16장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렇다면 성령께서 오시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던 조건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입니다. 은사주의자들과 논쟁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오순절 날 처음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충만한 능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도기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어느 정도 겹치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약 언약의 시대 의미로서는 완전한 성도들이었지만, 교회가 탄생한 오순절이 오기 전까지는 성령님의 시대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분명 시간적인 순서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0장에서 성령을 조금만 받고 있다가 사도행전 2장에서 충만하게 받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께서 장차 이루어질 일을 약속하신 선언일 뿐입니다.

이제 다시 사도행전 2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성령님의 유일한 임재 사건이 나옵니다. 제가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구하지 않았습니다. 찾지도 않았습니다. 간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내어 맡기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의 어떤 특별한 행동도 없습니다. 본문은 단지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그뿐입니다. 함께 한 방에 모여 있었을 뿐입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별한 영적 자격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 일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없고,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없고, 자신을 맡기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없고, 간청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고,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셨습니다. 교회가 탄생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간청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이 이미 매우 중요한 날로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구약에서도 성령과 깊은 관련을 가진 특별한 절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이르렀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무엇을 했느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오순절주의의 대표적인 기관지인 <오순절 복음(Pentecostal Evangel)>에는 매 호마다 이런 신앙고백이 실립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 4절에 따른 성령세례가 구하는 신자들에게 주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은 성령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8장에서도 구하지 않았고, 10장에서도 구하지 않았고, 19장에서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이 임하시는 네 번의 사건 가운데 사람들이 성령을 구하는 장면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보통의 경험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반복해서 나타나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것일 뿐입니다. 성령께서 처음으로 임하신 사건일 뿐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아담은 어떻습니까?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성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정상입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시작점이 있어야죠. 만일 창세기를 붙들고 "창세기가 표준이다. 그러므로 아기로 태어났다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성인으로 태어나야 하고,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주장입니까? 시작은 그저 시작일 뿐입니다. 시작을 표준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성령님이 처음으로 오신 사건일 뿐이고, 교회가 탄생한 사건일 뿐입니다. 그런 일은 안디옥에서도 일어나지 않았고, 갈라디아에서도 일어나지 않았고, 빌립보에서도 일어나지 않았고, 골로새, 로마, 데살로니가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반복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시작을 알린 것일 뿐입니다.

그 이후로 성령님은 믿는 순간에 임하셨습니다. 실제로 로마서 8장 9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말합니다.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없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따라서 결론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12장 12절과 13절은 우리 모두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모두가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생수의 강이 우리 모두에게서 흘러나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명령은 에베소서 5장 18절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성령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안에 충만히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계속해서 성령 충만 가운데 거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성령 충만을 따로 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행하고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성령 충만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성령을 구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교회 역사 전체에 걸친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정말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또 하나 흥미롭고 도움이 되는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여기 주목하십시오. 실제 바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람 같은 소리입니다. "~같은"이라는 말은 실제 바람이 아니라 바람 같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거센 바람이 지나갈 때 나는 휙 이런 소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가 그들이 모여 있는 온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잘 보십시오. 실제 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불의 혀 같은 것입니다.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작은 불의 혀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작은 불의 혀 모양이라면 작은 불꽃처럼 보였겠죠. 저는 그저 본문이 말하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머물렀습니다.

이제 이 장면을 구분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먼저 2절에서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도 바람에 비유됩니다. 사실 같은 단어가 사용됐기 때문에 "급하고 강한 영"이라고 번역해도 됩니다. 히브리어로는 '루아흐', 헬라어로는 '프뉴마'입니다. 둘 다 '영' 혹은 '바람'이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각 사람이 실제로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께서 오실 때 누가 성령을 받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작은 혀 모양의 불꽃이 하나씩 나타난 겁니다. 모두가 받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성령 임재 사건입니다. 먼저 성령께서 오시고, 그다음에 성령을 받으며, 그다음에 다른 언어로 말하는 성령 임재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구원 이후에 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그 언어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표적이라는 매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큰일을 말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이게 무슨 일이야? 분명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설교하자 삼천 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방언이나 다른 언어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설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건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경험이 되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한 방에 모여서 이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과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하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데 이 말씀을 누구에게 했습니까? 육신적인 고린도 교인들에게 했습니다. 문제가 많고 형편없었죠. 그럼에도 그들은 성령의 전이었습니다. 그들 안에도 성령님이 계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매우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방언은, 나중에 고린도전서 14장을 살펴보면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이사야서에 예언된 대로 이스라엘을 위한 특별한 표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만을 위한 특별한 심판의 표적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매우 분명하게 설명이 됩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도록 짧게 한 구절만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1절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여기서 바울은 방언이 왜 주어졌는지를 설명합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사야 28장을 인용했습니다. "이 백성"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여기까지만 보겠습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본질적으로 심판의 표적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오랫동안 너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했지만 너희는 듣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하겠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심판의 표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말을 들을 수 있었을 때는 듣지 않더니, 이제는 듣고 싶어도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방언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특별한 표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중에 제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 사건의 독특한 점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전히 구약 성도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교회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셨고, 이전에는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표적들이 함께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나고, 불의 혀 같은 것이 보이고, 또 다른 언어로 말을 하는 현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실제로 임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기 원하셨습니다. 만약 바람 같은 소리도 없고, 방언도 없고, 불의 혀 같은 것도 없었다면 사람들은 "무슨 일이 정말 일어났어? 무슨 일이 있기는 했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분명한 표적들을 주셨습니다. 교회의 시작이 그렇게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8장으로 가서 두 번째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을 두 번째로 받는 사건이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사도행전 8장 앞부분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14절에 이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잘 들으십시오. 16절에 따르면 이들은 이미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사도들이 와서 안수하고, 그 결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이것이 바로 구원 이후에 성령을 받는 두 번째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구원 이후에 일어난 일 맞습니다. 먼저 구원을 받았고, 그 후에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이것 역시 과도기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답은 아주 쉽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어디로 내려갔습니까? 사마리아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를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아주 몹시 미워했습니다. 약 500년 동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증오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이방인들과 통혼해서 혼혈 민족이 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강한 민족주의와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 때문에 그렇게 다른 민족과 섞인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심각한 인종적, 종교적 갈등이 존재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이 북쪽으로 여행할 때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일부러 빙 돌아갔습니다. 사마리아 흙조차 발에 묻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의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는 기록이 놀라운 것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 가장 곧고 평탄했지만, 유대인들은 절대로 그리로 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땅을 밟음으로써 자신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이렇게 갈등의 골이 아주 깊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는 순간 곧바로 성령을 받았다면, 그 오랜 분열은 계속 지속되었을 겁니다.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인만의 교회를 만들고,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만의 교회를 만들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가 분리된 채로 남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여,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죠.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 주시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루셨습니다. 유대인인 사도들이 직접 와서 자기들의 눈으로 사마리아인들의 구원을 보고, 자기들의 손으로 안수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을 한 지체로 포함시키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과도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분리된 작은 교회 두 개가 생겨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진정한 회심과 성령을 받는 사건이 사도들의 눈앞에서 분명하게 확인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두 번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사도들의 권위와 능력을 분명히 인정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초대교회가 무엇을 힘써 배웠습니까?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도 교회의 한 지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했던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들도 사도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권위 있는 사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바로 이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사도들은 하나님의 사자이구나, 비록 유대인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다"라고 고백하게 되었고, 유대인들 역시 "비록 저들이 혼혈 민족일지라도 우리와 똑같은 성령을 받았으니, 사마리아 사람들도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다"라고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도적 권위와 교회의 연합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여기서 문법적으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6절에는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을 직역해 보면 "아직까지는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임하지 않으셨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직까지는"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우데포(oudepō)’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단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자세히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원래 일어났어야 할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매우 흥미롭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표현은 두 사건이 원래 하나의 사건을 이루는 요소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이상하게도 아직 성령은 임하지 않았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아직"이라는 말은 반드시 곧이어 일어나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즉, 두 요소가 원래는 하나의 사건으로 함께 일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 사용된 표현 자체도 원래는 구원과 성령을 받는 일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는 시간 간격이 있었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사도들의 권위를, 유대인들에게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한 지체임을, 같은 성령을 받은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연합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세 번째 경우인 사도행전 10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여기서 세 번째로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대인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이번에는 이방인들입니다. 이제 복음이 점점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갑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적대감이 깊었다고 했지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감은 그보다 훨씬 더 심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 땅을 여행하고 돌아오면 자기 발과 옷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렸습니다. 이방인 땅의 먼지조차 자기 나라로 가져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낙태한 태아를 집안에 있는 배수구에 버리기 때문에, 그 시신으로 집이 더러워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늘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꺼렸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만든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 정육점에서 손질한 고기조차 사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식기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의 골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했습니다. 미국의 노예제도 시대에 흑인과 백인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것보다 백 배쯤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조금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의 갈등이 심했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백 배쯤 더 심하게 생각해야 겨우 비슷해집니다. 그만큼 적대감이 극심했습니다.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봅시다. 하나님은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아주 어려운 일을 맡기려 한다. 이방인들을 나에게로 인도하러 가라." 베드로는 마치 요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물론 요나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죠. 요나처럼 항구 도시, 해안 지역에 있었지만 도망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지붕 위에 올라가서 잠시 쉬다가, 10절을 보면 황홀경 상태에 빠집니다. 오늘 아침에도 잠깐 말씀드렸듯이, 하늘이 열리고 네 귀를 맨 큰 보자기 같은 것이 거대한 줄에 매달려 내려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스가랴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보았던 그런 종류의 환상입니다.

그 보자기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짐승들을 보고 있을 때에 소리가 들렸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그러나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렇게 대답했죠.

유대인들에게는 음식에 관한 규례가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레위기를 읽어 보십시오. 먹으면 안 되는 새와 동물이 있었습니다.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은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동물인지는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레위기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역자들에게도 이야기했는데,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새김질하는 동물 가운데 토끼가 들어 있는데,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러분, 알고 계셨습니까? 토끼에 대해 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번식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그건 다 아실 겁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사람들은 왜 성경이 토끼를 새김질하는 동물이라고 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옛날에 히브리 학자들이 내놓은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토끼가 먹이를 씹을 때, 턱을 이렇게 좌우로 움직이기 때문에 새김질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토끼는 소처럼 위가 여러 개가 아닙니다.

그런데 토끼가 실제로 놀라운 방식으로 새김질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20세기에 발견된 것입니다. 토끼는 먹이를 먹고 한 번 배설한 뒤에 다시 한 번 더 먹습니다. 성경이 정확했습니다. 20세기가 되어서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죠. 참고로 말씀드리면, 토끼 고기는 아주 좋은 음식입니다. 지방 함량이 매우 낮기 때문에 구해서 먹을 수만 있다면 아마 닭고기보다도 건강에 더 좋을 겁니다. 소고기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다만 맛이 그렇게 썩 좋지는 않습니다. 제가 토끼 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이런 음식 규례를 주신 이유는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보다 본질적으로 더 깨끗하거나 더러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된 백성으로 삼고자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는, 특별히 구별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원칙을 지나치게 확대해서 적용하다 보니 결국에 우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음식 규례를 철저히 지키고 있었는데, 이제 환상 가운데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엇이든 잡아먹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저는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그리고 이 말씀은 그 의미를 분명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사람들을 만났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 어서 오십시오. 처음 접촉할 '부정한 존재'는 고넬료입니다. 이제 이방인의 집으로 갑시다."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의 편견을 내려놓고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43절을 보십시오. 그 전에 베드로는 아주 훌륭한 설교를 합니다. 38절부터 잠깐만 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의 초청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모두가 믿었습니다. 고넬료는 그저 그 말씀을 듣기 위해 앉아 있었고, 말씀을 듣는 즉시 모두가 믿었습니다. 그 결과 4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잘 들으십시오. 여기에는 오순절주의가 말하는 구원 이후의 두 번째 성령 체험이라는 교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믿는 즉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십시오. 45절이 핵심입니다. "할례 받은 신자들." 이들이 누구입니까? 믿는 유대인들입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놀랐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왔던 유대인 신자들은 성령의 선물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그들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방인들에게 방언을 하게 하셨을까요? 오순절과 동일한 목적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동일한 성령께서 동일한 방식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임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이런 표적이 없었다면, 유대인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러분, 과도기입니다. 구원 이후에 따로 성령을 받는 일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구원과 성령 받는 일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지만 방언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반대로 여기 사도행전 10장에는 시간적인 간격은 없지만 방언이라는 표적이 나타납니다. 47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여러분,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성령을 받는 것과 회심, 그러니까 구원이 같은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다음에 세례를 받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보십시오. 베드로는 성령을 받는 것과 구원을 동일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둘을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의 경우에만 성령의 임하심이 잠시 지연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방언이라는 표적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도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으며, 동일한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크게 놀랐던 것이죠.

이제 사도행전 11장 15절을 보십시오. 이 놀라운 일을 경험한 뒤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그 일을 보고합니다. 11장 15절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고넬료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대로 돌아와서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보고했던 것이죠. 11장 1절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자…" 라고 하면서 방금 우리가 읽은 사건을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저는 이 마지막 말이 참 재밌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제가 막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여러분 편이었습니다. 저도 이 일에 휘말린 사람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제 왜 하나님께서 기다리게 하셨는지, 왜 과도기가 필요했는지, 그리고 왜 방언이라는 표적을 주셨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에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평범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하나의 교회에 연결하시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의 교회에 연결하시기 위한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사도행전 15장 8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보고하면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이 방언과 함께 성령을 받은 이유는,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있는 자리에서 그런 방식으로 그 일이 일어난 이유는, 이방인들에게는 사도적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고,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들도 자신들과 동일한 성령을 받은 같은 교회의 지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마지막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절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의 과도기적 상황과 아볼로의 과도기적 상황을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또 다른 열두 사람이 과도기의 한가운데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은사주의자들은 "자, 보십시오. 또다시 성령세례와 방언이 나오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구원 이후에 따로 성령을 받는 일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고넬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원받는 순간 성령도 함께 받았습니다. 따라서 먼저 구원을 받고 나중에 성령을 받는다는 개념은 사도행전 2장과 8장에만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과 19장에 이르면 이미 그 양상이 달라져 있습니다.

19장을 보십시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여기서 '제자'라는 말은 단순히 배우는 사람들, ‘마데테스(mathētēs)’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이 본문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때는 이미 교회가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죠? 이미 하나였습니다. 유대인도 있었고, 이방인도 있었고, 사마리아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다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더 이상 구원 이후에 따로 성령을 받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성령의 임하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적이 있을 뿐입니다. 참고로 여기서도 성령을 구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간구도 없고, 요청도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처음부터 이 사람들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저는 사도행전을 강해하면서 처음 이 말씀을 연구했을 때 이 구절이 정말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무엇을 전제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사실상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직 과도기에 있습니까?" 왜냐하면 정상적인 경우라면 믿는 순간 성령을 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기다릴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기도할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자신을 비웠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순종했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자신을 내어 맡겼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단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 믿는 순간 성령을 받는 것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물론 아직 과도기 중에 있었던 특별한 경우는 예외였습니다.

이 질문 자체가 믿음이 생기면 성령도 함께 임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죠. 원문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이미 주어졌다는 사실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물론 성령이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성령에 대해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누가복음 3장 16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성령에 대해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미 오셨다는 사실은 듣지 못했던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직 충분히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볼로와 똑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죠.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여러분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군요. 아직 과도기에 있군요."

이 사람들이야말로 구약 성도들의 마지막 남은 무리였습니다. 세례 요한 이후에 약 20년이 지난 시점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무려 20년이 지난 뒤입니다. 정말 신실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에베소 한구석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겁니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아, 여러분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군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준비시키기 위한 세례, 곧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은 것입니까? 그것이 전부입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누구를 전해 줍니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여러분, 이제 성령을 받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십시오."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아, 여러분은 성령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군요. 도대체 어떤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까?"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이미 모든 답을 알고 있었죠.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면, 그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은 믿을 때 함께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질문은 사실 이런 뜻입니다. "도대체 어떤 세례를 받았기에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겁니까?" 바울은 성령을 받는 것이 믿음과 함께 일어나는 정상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4절에서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주제는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의 이 열두 사람에게 부족했던 것은 성령세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자 곧바로 믿었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안수하자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셨고, 방언도 말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들은 믿는 순간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그들에게 안수했을까요? 이제부터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아니라 누구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로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왜 그들에게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놀라운 경험이 허락되었을까요? 비록 그들이 구약 시대와 연결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옛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모든 성도들과 함께 동일한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는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브루스 톰슨(Bruce Thompson)은 이 문제를 아주 재미있는 예시로 설명해 줍니다. 아주 좋은 예를 많이 드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 이것은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 장치와 비슷하다. 그 법이 처음 시행되었을 때 이미 차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따로 배기가스 장치를 달아야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자동차를 살 때부터 그 장치가 기본으로 달려 나왔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물론 성령을 배기가스 규제 장치에 비유하는 것을 너무 밀어붙여서는 안 되겠지만, 요점은 이해하실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도기 한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과 8장에서 구원과 성령 받는 일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던 것도 이런 과도기라는 사실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과 19장에서 방언이 나타나고 사도들이 직접 안수한 이유는, 그들에게도 처음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그들이 사도적 권위를 받아들이게 해서 교회가 동일한 교훈 위에 서고, 동일한 사랑과 연합, 그리고 동일한 공동체의 삶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표준으로 만들어 버리면, 사도행전의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교훈이 기록되어 확립되고 교회에 주어지면, 그런 표적들은 그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또 유대인과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 그리고 구약 시대에서 넘어온 사람들까지 모두가 하나의 교회 안에 포함되고 나면, 더 이상 새롭게 포함시켜야 할 집단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이 완성되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런 과도기의 사건들을 명령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모든 시대의 표준이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규범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은사주의자들이 방언만을 절대적인 표준이라고 주장한다면, 왜 바람 같은 소리나 머리 위에 나타난 불의 혀 같은 것도 함께 표준으로 삼지 않는 것일까요? 왜 세 가지 표적 가운데 하나만 가져오는 겁니까? 나머지 두 가지도 함께 가져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또 하나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행전 2장과 8장, 10장, 19장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 사도들이 있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에도 성령을 받기 위해서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 같은 사도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겁니까?

또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성령께서는 언제나 한 개인이 아니라 한 무리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은사주의자들은 이것도 표준으로 삼지 않는 겁니까? 사도행전에서 어느 누구도 성령을 구하거나, 성령을 받기 위해 자신을 내어 맡기거나,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거나, 방언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사건이 표준이라면 왜 오늘날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겁니까? 왜 또 사도행전에 기록된 기적이나 표적이나 기사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가져오지 않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사도행전 3장처럼 지금도 계속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를 제안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교회는 유대인들이 했던 것처럼 기도 시간마다 성전에 모이지 않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회당에 가지 않고 여기에 모여 있는 것입니까? 또 왜 사도행전 2장처럼 날마다 집집마다 모여서 떡을 떼고 매일 성찬을 나누지 않는 겁니까? 왜 모든 사람이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처럼 회심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직접 보고 사흘 동안 눈이 멀어 있다가 아나니아 같은 사람을 기다리는 경험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만일 그것이 표준이라면, 우리도 그런 경험을 원하면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사도행전 6장을 보면 교회는 사도들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에는 장로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입니까? 또 우리가 사도행전을 모든 시대의 표준으로 받아들인다면, 사도행전 15장의 지침도 그대로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거기에는 유대인을 만날 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그것은 오늘날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라고 할 겁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은 오늘날에 해당되지 않는데 다른 것들은 모두 오늘날에도 해당된다고 하는 겁니까?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골라서 취하면 안 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행전에는 교회 건물이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절대적인 표준입니까? 사도행전에는 성가대도 없습니다. 그것도 절대적인 표준인가요? 사도행전에는 주일학교 교사도 없습니다. 이것도 절대적인 표준입니까? 오늘날에도 전도자들이 빌립처럼 비행기도 없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야 합니까? 또 헌금을 약속한 만큼 내지 않았다고 사람을 죽여야 합니까? 한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헌금함을 발명한 사람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동전을 넣으면 종이 울리고, 지폐를 넣으면 부저가 울리고, 아무것도 넣지 않으면 사진을 찍는다.

어쨌든 사도행전이 모든 시대의 절대적인 규범이라면, 왜 우리는 모두 나실인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또 사도행전이 절대적인 규범이라면, 왜 바울처럼 예루살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서둘러 달려가지 않는 것입니까?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급히 올라가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은 분이 계십니까? 아시겠지만, 사도행전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사도행전은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조셉 딜로우(Joseph Dillow)는 그의 저서 <방언 말하기(Speaking in Tongues)>에서 매우 도움이 되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경험을 가르치는 비극적인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경험해야 한다."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사도들의 경험은 과도기의 책인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도들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을 인도하는 기준으로 서신서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잘 들으십시오. 사도행전의 핵심은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인가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구약 시대에서 넘어온 사람이든 누구나 성령을 받습니다. 언제 받습니까? 믿을 때 받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사도행전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책입니다. 새로운 시대,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선물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핵심이지, 나중에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며 그것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8장 18절을 함께 보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말씀을 결론으로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8장 18절입니다. 거기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시몬이…" 이 사람은 사도 베드로가 아니라, 9절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입니다. 마술사인데 신접한 자였죠, 귀신들과 교통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돈을 드려…" 잘 보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제가 간단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시몬은 무엇을 원했습니까? 무엇을 원했습니까? 권능,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은사주의자들이 언제나, 늘상, 언제나 추구하는 것이 뭡니까? 바로 능력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성령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능력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잘 들으십시오. 바로 시몬이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보십시오. 시몬은 능력을 원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대가를 기꺼이 치르려고 했습니다. 돈으로 값을 치르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은 능력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내어 맡기고, 항복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합니다. 그러나 능력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는 아주 강하게 책망합니다. 20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잘 들으십시오. 사람은 결코 자신의 노력으로 성령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능력을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을 자기 노력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핵심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을 강하게 꾸짖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선물을 부인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마치 하나님께 "주님은 제게 성령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미 충만하게 주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다"라고 말합니다. 시몬의 죄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능력을 자기 노력으로 얻으려고 했다는 데 있습니다.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I Believe in the Holy Spirit)>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언제나 능력을 추구했다. 영적인 능력에 도취되어 있었다. 언제나 능력에 이르는 지름길을 찾고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오직 그 약함을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도의 표적과 기사와 능력 있는 일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육체의 가시를 견디며 참아낸 고난과, 선교 사역 가운데 겪었던 모욕과 어려움을 인내한 데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은사주의자들은 부활과 그 능력에 대한 신학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나타내는 것은 십자가와 그 수치라는 사실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사도행전의 첫머리에서 이 문제를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언제 권능을 받습니까? 성령이 임하신 때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언제 임하십니까? 믿을 때입니다.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능력을 추구하기보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는 고난을 추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에도 귀한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때로는 사람의 말이 충분히 명확하지 못했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나눈 모든 내용을 우리의 생각 속에서 하나로 묶어 주옵소서. 우리가 어떤 운동과 싸우려는 것도 아니고, 어떤 신학을 변호하려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여 말씀을 옳게 분별함으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주님의 진리에 굶주리고 의에 목말라 이 자리에 나온 이 귀한 성도들로 인해 감사합니다. 이들을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미 이들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이들의 마음이 깨끗해질수록 더욱 충만하게 역사하시고, 이들의 생각과 삶을 온전히 다스려 주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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