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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지난 주일에 시작한 은사주의 운동 시리즈를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고린도전서 13장을 다뤘고요, 지난 주일부터 은사주의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여러분의 반응을 보면서 제가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물론 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시고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오히려 더 많은 분들이 “은사주의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성경적 관점을 제시해 주셔서 감사하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이 은사주의 운동 시리즈는 우리 교회 장로님들께서 만장일치로 필요하다, 이렇게 결정하셨습니다. 그 결정에 따라서 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감사하다고 해주시니 저도 감사할 뿐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의 마음을 하나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교회는 은사주의 운동 문제를 반드시 다루어야 합니다. 교회 역사 속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새로운 운동이 등장했습니다. 교회 역사를 조금만 공부를 해봐도, 여러 운동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성경적 진리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운동 중에서 오늘날의 은사주의 운동만큼 복음주의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심각한 혼란을 가져온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이 미치는 영향은 실로 막대합니다. 대중매체가 발달을 하면서 이런 사상들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은사주의 운동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미국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미며, 아시아며, 교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아주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오순절 운동은 1990년에 복음주의 기독교의 주류 밖에서 출발을 했지만, 그 이후로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오순절 운동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은 복음주의 교단이 아닌 다른 교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에 이르러서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그동안 주류 교단 밖에 머물러 있던 오순절 운동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거죠. 그 중의 하나가 캘리포니아 밴나이스의 성공회 교회였는데, 그 일을 계기해서 교단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존 셰릴(John Sherrill)은 그의 저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들(They Speak With Other Tongues)>이라는 책에서 당시의 상황을 가리켜서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후에 오순절 운동은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루터교 이렇게 여러 주류 교단 깊숙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자신들을 오순절주의자라고 부르지 않고, 신오순절주의자(Neo-Pentecostal) 혹은 은사주의자(Charismatic)라고 합니다. 이 둘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1960년 이전의 오순절 운동에 속한 사람들을 오순절주의자 이렇게 부르고, 1960년 이후에 주류 교단이나 복음주의 교회, 혹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신비 체험을 수용한 사람들을 은사주의자 이렇게 부릅니다. 반면에 전통적인 의미의 오순절주의자는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포스퀘어 교단(Foursquare Church), 연합오순절교회(United Pentecostal Church)와 같이 오순절 계열 교단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현재 기독교 전체에 퍼져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의 교단이 아니라, 모든 교단의 경계를 넘어서는 신비 체험 운동으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주의 운동 안에는 공통분모가 존재하는데, 신학에 근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실상 일관된 신학 체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공통된 신비 체험입니다. 예를 들어서, 은사주의 교회에서 교역자나 교직원으로 섬기려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로 공통된 신비 체험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학이나 신학교에서도 교수로 임용하기 위한 핵심 자격으로써 신비 체험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판단 기준이 신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우리 주변 곳곳에서 공통된 신비 체험을 바탕으로 은사주의자들의 커다란 네트워크가 형성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이라고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를 외면한다면, 마치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하고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이 문제를 반드시 다뤄야 합니다. 특히 고린도전서를 공부하면서 12장부터 14장에 이르게 된 지금,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문제를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사람들이 구원을 받죠. 은사주의 운동에 속한 사람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을 믿고, 또 전합니다. 그 결과로 실제로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 사실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이들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저도 사용하시고 여러분도 사용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입장입니다. 따라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은사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아무 쓸모도 없고 소망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게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범하는 오류를 지적하려는 겁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약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은사주의자들의 문제를 바라보듯이 우리 자신의 약점도 정직하게 인정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제가 하려는 것은 단지 그 오류가 무엇인지를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제목이 "은사주의 운동의 문제점이 무엇인가?"인 것이죠. 은사주의 운동 전부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은 잘못이 아니죠. 또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성경을 믿는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물론 그 믿음을 실제로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참된 복음 선포를 통해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현실을 깨닫고,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헌신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면들이 있고 실제로 선한 결과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 운동 안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 오류가 아무런 제재나 교정 없이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란에 빠져버렸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위축되고 위협을 느끼고, 심지어 교회들이 분열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다루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앞으로 20가지 정도의 문제를 살펴볼 겁니다. 그런데 첫 번째 문제가 너무나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을 조금 더 들여서 몇 주에 걸쳐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바로 이 문제가 모든 논쟁의 핵심입니다. 더욱이 제가 읽어 본 많은 책들 중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룬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계시의 문제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 계시를 은사주의 운동의 첫 번째 문제로 제기했습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어진 하나님의 완성된 말씀, 곧 성경의 계시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죠. 단순히 하나의 쟁점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주장과 경험 역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검증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성경의 권위를 분명히 세워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로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는 은사주의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열정과 경험에 이끌려서 아무런 검증도 받지 않고 계속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왜냐구요?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시험하는 기준은 오직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자, 만일 성경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면,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저는 지금 이 점을 분명하고 신중하게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완성된 정경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확신합니다. 이 정경(canon)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논(kanon)’에서 나온 것인데요. 규범 또는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갈대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갈대를 측량하는 도구로 사용을 했죠. 그래서 점차로 길이를 재는 자나 측정 기준을 가리켜 ‘캐논’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기준이요 척도입니다. 성경이 바로 ‘캐논’, 그러니까 정경입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경을 이미 완성하셨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완성이 이미 되었고, 계시도 이미 종결이 되어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완전합니다. 성경은 충분합니다. 성경은 무오합니다. 성경은 무류합니다.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우리를 구속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선지자들이 기록했고, 신약은 사도들, 그리고 사도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이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덧붙여서 말씀드리자면,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를 포함해서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책들이 계속 있었습니다. 가톨릭교회에 다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가톨릭 성경에는 외경(Apocrypha)이라고 불리는 책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경을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책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외경에는 역사적인 오류도 있고, 지리적인 오류도 있고, 신학적인 오류도 있습니다. 또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지도 못하고, 실제로 사도적 권위를 뒷받침할 근거도 없습니다. 저자들 역시 사도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 속한 책도 아니고, 구약 시대에 속한 책도 아닙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도록 인정받았던 선지자나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기록된 책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외경을 성경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뿐입니다. 사실 로마 가톨릭교회가 받아들이기 전까지 교회는 외경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책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둘 사이의 차이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백했습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도 교회 안에는 성경인 것처럼 주장한 책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 복음>, <콥트 전설>을 비롯한 수많은 위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크게 혼란을 겪지 않았습니다. 어떤 책을 정경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서 머뭇거린 적도 없습니다. 어떤 책이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서 기록된 말씀이고 어떤 책이 그렇지 않은지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정경은 주전 400년경,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약 400년 전에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떤 책이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기록된 말씀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구별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 책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책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검토해 보니 그 안에서는 아무런 오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역사와도 맞아떨어지고, 신학적으로도 일관되고, 지리적인 사실과도 부합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진리의 기준으로 알고 있던 모든 것과도 완전히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정경을 누구나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다른 책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에스라가 세운 서기관들의 학파, 그러니까 대회당(Great Synagogue)이 최종적으로 정경을 정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이후의 역사는 그 판단이 옳았음을 입증해 왔습니다. 성경과 같은 수준의 권위와 완전성을 보여줄 수 있는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고대의 다른 문헌을 발견한다고 해도, 결코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없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는 어떤 책들을 신약성경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판단했을까요? 제가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기준은 사도적 저작권입니다. 신약성경은 반드시 사도가 기록했거나 사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기록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가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베드로와 동역했죠.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증언에 근거한 것입니다. 누가 역시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사도들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고, 특별히 사도 바울과 오랫동안 함께 사역했습니다. 그래서 누가의 기록 역시 사도적 권위와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사도들이 직접 기록했거나 사도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기록했습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고 싶은 구절이 몇 개 있는데, 첫 번째,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주님은 배반당하시기 전날 밤, 그러니까 배반을 당하시던 그 밤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다락방에 계셨습니다. 거기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paraklētos), 옆에서 돕도록 부름받은 분이죠, 하나님의 변호자이신 성령입니다.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여러분이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장차 신약 성경을 기록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자, 보십시오.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건과 대화를 어떻게 기억해 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권위가 있고, 오류가 없고, 무오한 네 권의 복음서를 우리에게 남길 수 있었을까요?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이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에게는 기억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서신서를 기록하면서 거듭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도 보았죠. 성령님의 역사로 바울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을 보십시오. 여기에서도 동일한 말씀이 동일하게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여기서도 주님은 신약 성경을 기록할 사람들이 오류 없이 기록할 것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실 것인데, 성령님께서 기록자에게 말씀을 주실 것이고, 그 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도들을 임명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2절에서도 다시 확인됩니다. 베드로는 1절부터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하죠. 베드로후서 3장 2절입니다. 보십시오.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저는 이것이 구약 성경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은 구약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라고 합니다. 주목하십시오. 여기서 베드로는 성경 기록자들을 두 부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선지자들이 구약 성경을 기록했고, 주 되시며 구주이신 주님의 사도들이 신약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러니까 신약 성경의 저작이 사도들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이 베드로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직접 기록했거나, 아니면 사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사도 곁에서 함께 사역하던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들과 함께 성경 기록도 종결되었다는 매우 분명한 증거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라는 말의 의미이죠. 사도들은 기초를 완성해 놓았습니다. 그 사역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기초는 한 번만 놓습니다. 20층까지 올라가면서 계속 기초를 놓지 않습니다. 기초는 한 번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우죠.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존재하던 그때 단번에 기록했습니다. 단번에 성도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렇게 성경이 완성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기록자들이 서로를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성령의 영감을 받은 기록자로 인정하는 예는 많습니다. 무슨 뜻인지 제가 보여드리죠. 디모데전서 5장 18절입니다. 신약 성경의 기록자들 사이에 동역 의식이 있었습니다. 일치가 있었습니다. 하나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반복되지 않을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18절 말씀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자, 보십시오. “성경에 이르되...” “성경에 이르되”라고 합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신명기 25장 4절을 인용한 것이죠. 신명기 25장 4절도 같은 말을 합니다. 설교자에게 정당한 보수를 주라는 내용입니다. 언젠가 이 말씀을 주제로 설교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 또 다른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어디에서 인용된 말씀입니까? 누가복음 10장 7절입니다.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바울이 누가가 기록한 말씀에 대해서, 신명기를 기록한 모세의 말씀과 동일한 성경적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십시오. 한 신약 성경 기록자가 또 다른 신약 성경 기록자를 성경의 기록자라고 부르면서 그 권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기록할 때도 그것은 모세가 기록할 때와 마찬가지로 성경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누가를 인정하고 있죠. 그리고 누가가 권위 있는 기록자라면 누가복음도 권위 있고 사도행전도 권위 있는 책이라는 뜻이 됩니다. 둘 다 누가가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누가의 기록을 성경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베드로후서를 보겠습니다. 3장 15절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두 번째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말하죠.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앞선 9절과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더디 오시는 이유는 능력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이제 나옵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무엇이 보이십니까? 베드로는 바울과 그의 모든 서신들을 다른 성경과 같은 권위의 성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누가를 인정하고, 베드로는 바울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성경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있죠. 사실 누가복음이 복음서 가운데 하나이니까 모든 복음서를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권위를 인정받는다면 다른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건과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제 16절에서 성경이라고 불리는 바울의 열세 편의 서신도 인정을 받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서 1장에서 증언합니다. “내가 기록한 것, 내가 배운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유다서 17절을 보십시오. 이것도 흥미롭습니다. 바울은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을 확증하고 있고, 베드로는 바울을 확증하고 있고, 이제 유다는 베드로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유다서 17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베드로후서에 나온 내용입니다. 유다는 베드로의 기록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도들 사이에는 일종의 사도적 연대 의식이 있었습니다. 제가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남아 있는 또 다른 주요 신약 성경 기록자는 요한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요한의 기록도 권위가 입증되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입증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일곱 편지가 나옵니다. 굳이 찾아보실 필요는 없지만, 그 편지들 각각의 끝부분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죠. “이것을 말씀하시는 이는…” 이렇게 한 뒤에 또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니까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성령을 통해 전달받아 기록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즉, 요한은 자신이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1장 5절에도 나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19장에도 나옵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그러니까 요한도 영감을 받은 기록자로 확증됩니다. 베드로도, 누가도, 바울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신약 성경의 기록자들은 서로의 권위를 확증합니다. 사도들과 또 함께한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공동체가 신약 성경 기록에 대한 책임을 맡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이 전부입니다. 이들이 기록한 성경이 전부입니다. 사도들이 기록을 끝냈을 때 성경 기록도 끝났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므로 핵심은 사도적 권위, 사도적 저작권입니다.

둘째로, 초대교회가 적용했던 두 번째 기준은 내용입니다. 단지 사도나 사도의 동역자로 알려진 사람이 기록했는지만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도 살펴보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십시오. 교회가 처음으로 모였을 때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라고 했죠. 두 번째 기준은 내용입니다. 그 기록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죠. 왜냐고요? 누군가가 어떤 문서를 들고 와서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단이 몰래 침투하려고 위조 문서를 만들어 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문서의 교리를 검토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으면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초대의 정경 목록들을 연구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 초기 정경들 가운데 정당하지 않은 책이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66권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교리가 올바르지 않은 잘못된 책을 정경 안에 포함시킨 적은 없었습니다. 교리적으로 잘못된 점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끼워 넣으려는 책은 결코 교리적으로 바르지 못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셋째로, 초대교회가 신약 성경의 정경 선별에 적용했던 세 번째 기준은 교회들이 읽었는가 입니다. 교회에서 읽었는가. 정경은 초대교회 이후 첫 세대 교부들에 의해서 반복해서 강조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아들였는가, 예배 중에 읽었는가, 삶의 일부로 삼았는가, 하나님의 성령께서 교회 가운데 축복하셨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있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그 책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으로 인해서 복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인정을 받고 있었다면 정당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사도적 권위가 있어야 했습니다. 교리와 완전히 일치해야 했습니다. 또 교회 안에서 읽혀야 했고, 교회의 검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입증되어야 했습니다. 능력 있게 선포되어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아야 했습니다.

이제 네 번째 기준입니다. 초대교회 다음 세대인 교부들이 인정하고 사용했는지의 여부입니다. 교부들이 보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정경 여부를 결정했습니다. 383년에 라틴어 벌게이트 성경이 편찬될 무렵이 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벌게이트(Vulgate)라는 말은 백성들의 언어, 그러니까 일반적인 언어를 뜻합니다. 성경은 정경으로 확정되어서 사람들의 손에 전달되었습니다. 그 안에 모든 책이 들어 있었습니다. 오직 올바른 책들만 들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종결되었습니다. 정경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래도 성경에 더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요한계시록 2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그러면 또 이렇게 묻겠죠. “그건 요한계시록에 더하지 말라는 뜻 아닙니까?”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마지막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무엇인가를 더한다면 결국 성경에 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은 마지막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더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요한계시록에 무언가를 더하면 기록된 재앙들이 그에게 더해질 것입니다.

또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존 목사님, 왜 이 문제를 그렇게 계속 강조하시는 겁니까?” 왜냐고요? 저는 바로 이 중요한 지점에서 은사주의자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은사주의 운동의 중대한 결함입니다. 물론 저는 은사주의자들을 사랑합니다. 은사주의자들도 성경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성경을 변호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연구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 외에도 계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이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성경도 좋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범위까지는 말이죠”, 이렇게 말합니다. 한 은사주의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 우리가 성경만 가르쳤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영이 돌파해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인가? 하나님의 영이 돌파해 들어오셨다니 추가로 필요하다는 뜻인가? 그리고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영이었다는 것을 누가 보장해주지?

추가적인 계시라니요? 성경만으로 충분합니까, 아니면 더 많은 것이 필요합니까? 제가 지난주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듯이,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수세기 동안, 정말 수세기 동안 그렇게 주장해 왔습니다. 흥미로운 책을 읽고 싶으세요? 아마 서점에 가면 있을 겁니다. 벤저민 워필드(Benjamin Warfield)의 <가짜 기적들(Counterfeit Miracles)>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그 책은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립니다. 정말 대단한 책입니다. 다만 만만한 책은 아닙니다. 각오를 하고 읽으십시오. 워필드는 교회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형성하는 데 사용된 환상과 계시들, 그와 관련된 여러 주장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도 많은 점에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환상과 여러 계시들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오늘 아침에 장로님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셨습니다. 테니스 선수 마거릿 코트(Margaret Court)는 아주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데, 최근에 기적적인 방식으로 성모 마리아가 자신에게 나타났다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사주의자들에게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수세기 동안 그런 주장을 해 왔습니다. 이런 추가적인 계시들이 계속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나란히 서는 아주 거대한 전통 체계를 만들어 냈고, 결국 문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멜로디랜드(Melodyland) 신학교 총장인 로드먼 윌리엄스(Rodman Williams)가 이런 말을 했다고 말씀드렸죠. “성경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 중의 하나를 증언하는 것에 불과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행하시는 일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그래서 제가 지난주에 이런 질문을 던졌죠. “그렇다면 성경 이외의 계시가 있을까요?”

데이비드 윌커슨(David Wilkerson)은 <환상(The Vision)>이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제 귀로 직접 그 내용을 들었습니다. 인쇄된 것도 보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것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그 동일한 루터교 집회에 참가한 또 다른 사람이 환상을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그 내용이 데이비드 윌커슨의 환상과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주의와 주관주의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 큽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고, 결국 말씀의 중심성이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 신비주의적 기독교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견뎌야 했던 바로 그런 상황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서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을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부흥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모두가 성경에 열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너무 빨리 움직인 나머지 성경을 지나쳐 버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기독교 서점에 가서 한번 살펴보십시오. 신학이나 교리 같은 내용보다 경험에 관한 책이 65퍼센트나 됩니다. 은사주의는 비록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지는 않을지라도, 본질적으로 역사적 정통주의 성경관이 아닙니다. 신정통주의적 주관주의입니다. 신비주의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인 ‘오직 성경’을 버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경이 스스로 주장하는 바를 거스르는 것이고, 결국 끔찍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이 문제를 다루겠다고 말씀드렸죠? 이제 하나씩 다루겠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거짓 체계들은 성경을 벗어난 계시를 통해 생겨났습니다. 여러분 알고 계셨습니까? 모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거짓 체계의 주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의 내용을 단번에 성도들에게 전달하시고 “이것으로 충분하다. 다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에는 아무것도 더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또 뺄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은 완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도 참 좋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입니까? 에베소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외에 또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또 다른 신령한 복이 있다고요?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이런 것들이 계속 덧붙여집니다. 이제 잠시 함께 살펴볼까요? 로마 가톨릭교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 가톨릭 교리를 체계화한 인물입니다. 1225년부터 1274년까지 살았습니다. 로마 가톨릭 스콜라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자신의 저서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첫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성경 본문과 교부들과 박사들의 가르침으로 구성된다.” 문제가 보이십니까? “성경 본문과 교부들과 박사들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 조르주 타바르(George Tavar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통이란 말씀이 넘쳐흐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전통입니다. “전통은 성경 밖으로 넘쳐흐른 말씀이다. 그 내용은 말씀에서 자신을 알리신 또 다른 성경이다.” 그러니까 타바르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고, 또 다른 성경이 있다. 이 ‘또 다른 성경’들은 성경 밖으로 넘쳐흘러 나온 것들이다.”

알베르투스 피기우스(Albert Piaget)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적 메시지가 교부들과 감독들을 통해 전해졌다면, 그 메시지가 기록되었든 기록되지 않았든 그것이 곧 성경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성경이란 교회의 사도적 메시지가 교부들과 감독들에게 전해진 것이고, 그것의 기록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기록되었든 기록되지 않았든 모두가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디가 끝일까요?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카를 쇼츠기어(Carl Shortzgi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제가 지금 보여드리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것에서 로마 가톨릭주의가 비롯되었습니다. 쇼츠기어의 말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친밀한 계시는 날마다 일어나는 일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참된 것으로 알려지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가르침만큼이나 구속력을 가진다.” 자,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입니다. 일상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뇨. 그렇다면 성경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 우리가 보는 여러 현상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 숭배, 성인 시성, 진리 주위에 자라난 온갖 잘못된 교리들 같은 것들입니다.

1854년 12월 8일입니다. 교황 비오 9세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이라는 교황 칙서를 통해서 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했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하고 선포하며 정의한다.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그녀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으로,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미리 입어 원죄의 모든 물듦에서 보호되셨다는 교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것이므로, 모든 신자들이 굳건하게 항구적으로 믿어야 한다.”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났다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교리이므로 모든 신자가 굳게 믿어야 한답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계시하셨다는 겁니까? 성경에서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런 내용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입니까? 성경 밖에서입니다. 또 다른 성경입니다. 자, 보십시오. 이제 또 다른 성경을 갖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시겠습니까?

1950년 11월 2일에, 또 다른 교황 칙서인 <지극히 관대하신 하나님(Munificentissimus Deus>이 발표됩니다. 이 칙서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칙서입니다. “우리는 선언하고 선포하며 정의한다. 티 없으신 하느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녀이신 마리아께서는 지상 생애의 여정을 마치신 후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의 영광으로 올려지셨다는 것이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교리임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금하시기를 바라지만, 누구든지 우리가 정의한 이 교리를 고의로 부인하거나 의심하려 한다면,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신앙과 가톨릭 신앙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음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가 육신 그대로 하늘로 올려졌고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인하면 가톨릭 신앙에서 쫓겨난답니다. 1950년의 교황 칙서 내용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왜 이렇게 오류가 많은지 이유를 아시겠어요? 성경을 벗어난 것들을 받아들이고, 마치 성경과 동일한 구속력을 가진 것처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오류 위에 오류가 쌓이고 또 쌓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것이 제가 은사주의 운동을 우려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외부적인 싸움이 아니라 내부적인 싸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도 똑같은 종류의 체계를 쌓아 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의 아주 유명한 지도자 중에 데이비드 뒤 플레시스(David de Plessis)가 있습니다. 데이비드 뒤 플레시스는 71세입니다.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교단 목사였는데,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관여한 일 때문에 하나님의 성회에서 제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은사주의 운동 안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스비낟.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집회와 대회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무디 먼슬리(Moody Monthly)>라는 잡지 1976년 10월호에 짧은 기사 하나가 실렸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은사주의 개신교 지도자 중의 한 명인 데이비드 뒤 플레시스는 교황이 엑스 카테드라(ex cathedra)로 말할 때 그것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와 의견을 같이했다. 하나님은 여전히 교황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신다.” 하나님께서 교황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신 적이 있습니까? 교회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맞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플레시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교황 무오성은 하나님께서 가톨릭교회를 새롭게 일으키시기 위해 사용하신 것이며, 지금 기독교계를 뒤흔들고 있다.” 플레시스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교황은 여전히 교회의 머리이다. 교황은 무오하고, 하나님은 지금 교황의 무오성을 사용하셔서 교회 안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계신다.” 정말 무서운 주장입니다. 보십시오. 공개적으로 은사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톨릭 신자와 똑같은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성경관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이들은 모두 성경이 계속 흘러넘친다는 개념을 공유합니다. 성경의 권위가 성경 밖에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는 개념입니다.

여러분,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고요? 은사주의적 성경관은 역사적으로 내려온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 성경관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같은 이단이 가지고 있는 성경관과 같습니다. 왜 성경에는 없는 여러 이상한 것들, 고해성사, 연옥, 그 밖의 여러 교리들이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덧붙여진 것들입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은사주의자들도 바로 그런 종류의 전통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건데요, “성령에 의해 쓰러짐(slain in the Spirit)”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번 주에 제가 은사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분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 그렇습니다. 성령에 의해 쓰러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에 의해 쓰러지는 일이 2주 이상 지속되면 안 됩니다. 성령에 의해 쓰러지면 실제로 넘어지니까요.” 여러분, 그런 치유 집회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람을 만지기만 하면 그대로 뒤로 넘어집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분위기에 들어가면 한계가 없어지고, 결국 누가 더 자주 성령에 의해 쓰러지는가를 경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하는 겁니까?” 그러자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그러한 방식으로 임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성경 말씀에 어디에 근거한 걸까요? 성경에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이것도 점점 쌓여 가는 전통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제 여기서 현대주의와 신정통주의 계열의 기독교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역시 성경을 벗어난 계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현대주의자들과 신정통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전부는 아니다. 성경은 좋은 모델이고 좋은 증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어떤 구절이 우리를 강하게 감동시키고 영적인 전율을 느끼게 하면, 그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물론 성경 자체만으로도 좋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새로운 영감을 주고 계신다.”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온갖 종류의 영감이 존재한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성경적 권위가 사라집니다. 현대주의자들과 신정통주의자들은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또 어떤 유명한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는 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성경 전체 가운데 실제로 영감을 받은 구절은 단 26절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26절뿐이랍니다.

무엇이든 우리에게 강한 감동을 주기만 하면 된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새로운 계시를 받을 수 있답니다. 오늘날 기록되는 것들도 성경과 동등하게 여깁니다. 성경이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랍니다. 대단한 책도 아니랍니다. 오류도 많답니다. 그래서 더 많은 계시를 원하고, 또 더 많은 계시를 원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순수한 자유주의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그래도 은사주의자들이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흥미로운 글을 제가 하나 읽어드리죠. 은사주의 운동을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해 온 <크리스천 라이프(Christian Life)>지 1976년 9월호에 오랄 로버츠 대학교의 찰스 파라 주니어(Charles Farah, Jr.)가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은사주의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더 신약 시대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수록, 궁극적인 인식의 방법으로서 이성과 경험에는 점점 덜 의존하게 되고, 점점 더 영적 인식(pneumatic knowing)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제가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영적 인식’이란 초자연적이고 특별한 영적 깨달음을 뜻합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 인식이란 모든 앎을 초월하는 앎, 모든 지각을 초월하는 지각, 모든 확신을 초월하는 확신,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이해이다.” 무엇입니까? 영지주의, 신비주의입니다.

도대체 왜 이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을 넘어서, 모든 앎을 초월하는 앎, 어떤 초영적인 지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까요? 신비주의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확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성을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동양의 신비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성령님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정말 사람들이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데 지쳐버렸습니다.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더 많은 혼란을 원하십니까? 성경 밖의 계시는 언제나, 언제나,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언제나 오류로 이어집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십시오. 디모데후서 3장 16절부터 17절이 말하는 것처럼, 성경은 여러분을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으십니까? 디모데후서 2장 15절을 보십시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시험을 이기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은 어떤 ‘앎을 초월하는 앎’이나 ‘확신을 초월하는 확신’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을 사용하셨고, 사탄에게 성경 말씀을 세 번이나 인용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 위에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 또 다른 예로 몰몬교를 보겠습니다. 몰몬교는 조셉 스미스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특별 계시에 근거하여 전체 체계를 세웠습니다. 몰몬교의 <신앙개조> 제7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방언의 은사와 예언과 계시를 믿는다.” 이것이 바로 몰몬교입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리를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적어도 성경에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몰몬경」의 앨마서 5장 45절부터 4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 일들을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보라, 나는 이 일들이 참되다는 것을 너희에게 증언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내게 알려진 것이다.” 앨마서의 저자가 하는 말입니다. 이어서 “이것이 내 안에 있는 계시의 영이다”라고 합니다. 자, 보십시오. 몰몬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혼란 그 자체 아닙니까?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치 그레이프 넛츠(Grape Nuts) 시리얼 같습니다. 그레이프 넛츠에는 포도도 없고 견과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기독교도 아니고 과학도 아닙니다. 어쨌든 <크리스천 사이언스 저널> 1975년 7월호, 제93권 제7호, 361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주장입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인간의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그 신성에 기초한 이성과 논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체계와 구별된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따라서 다른 모든 체계와 구별된다.” 그러면서 362쪽에서는 메리 베이커 에디 패터슨 글로버 프라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 이름이 괴상하죠. “메리 베이커는 이 시대를 위한 진리의 계시자이다.” 자, 보십시오. 또 다른 계시가 등장하면 결국에는 이런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메리 베이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과학과 건강, 그리고 성경의 열쇠>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그리고 내가 그 저자이시며 하나님이신 분과 무관하다면, 나는 그 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단지 필경사에 불과할 것이다.” 메리 베이커는 <과학과 건강, 그리고 성경의 열쇠>를 하나님께서 쓰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하나님도 아니고, 성경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파수대(The Watchtower)>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잡지인 이유는 그 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943년 4월 15일자 <파수대> 127쪽에 실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파수대>를 쓰셨답니다. 이 말을 믿으십니까? 저는 믿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파수대 협회(Watchtower Society)”를 하나님의 계시 통로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허버트 W. 암스트롱, 가너 테드 암스트롱, <월드 투모로우(The World Tomorrow)>, <플레인 트루스(The Plain Truth)>, 패서디나의 앰배서더 칼리지 등등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런데 이 이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십니까? 정말이지 심각한 이단입니다.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칩니다. 가장 혐오스러운 이단이죠.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허버트 W. 암스트롱의 아내가 천사로부터 환상을 받았다고 주장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천사가 그 체계 전체를 설명해 주었고, 그것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시작된 것입니다.

통일교는 또 어떻습니까? 미국에서는 ‘무니스(Moonies)’라고 불리죠.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통일교 교주 문선명은 자신을 궁극적인 진리를 가진 하나님의 신적 사자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최종적인 진리라고 하면서 “나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최종적인 진리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래야만 하겠죠. “새로운 진리,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닌 진리”라고 합니다. 또 “문헌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이 성경과 충돌한다면 성경이 틀린 것이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Children of God)은 또 어떻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세요? 모세 데이비드 버그(Moses David Berg)는 자신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말세의 선지자 모세라고 주장했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라고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5년 동안 500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1977년 2월 18일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명의 첩을 두고 있다고 알려진 버그는 자신의 편지가 오늘날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어제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편지들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인 몇몇 관행들을 지지하고 있다.”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는 순간, 결국에는 성경을 대체하는 또 다른 권위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고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에드거 케이시(Edgar Cayce)에서부터 L. 론 허버드(L. Ron Hubbard)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온갖 괴짜들까지 모두 자신이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코란 들어보셨죠? 이슬람의 경전 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일련의 계시들을 통해 받았다고 합니다. 서기 610년경 라마단 기간의 어느 날 밤, 무함마드가 잠들어 있었는데 한 천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천사가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가브리엘입니다. 그가 무함마드에게 나타나 코란의 첫 부분을 전해 주었고, 서기 650년경에 이르러 전체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천사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본을 보십시오. 일본에는 새로운 종교 두 개가 큰 세력을 형성하며 퍼져 가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창가학회가 가장 대표적인 신흥 종교였습니다.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종교인데요, 그 기원이 창시자에게 주어진 특별한 계시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천리교와 금광교라는 두 종교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종교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비한 계시를 통해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저는 그 계시들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는 문서들의 복사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도의 구루나 신비주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1976년 10월 20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바하마에서 두 사람을 살해한 남성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참으로 이 시대가 갈구하는 계시입니다. 1974년 2월 19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실직 상태의 한 건설 노동자가 월요일, 자신의 스무 번째 생일에 가족 일곱 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내 양 떼를 모아 나에게 데려오라’는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안관 J. P. 월리스(J. P. Wallac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랭크 리오스(Frank Rios)는 이른 새벽 22구경 소총을 들고 자신의 이동식 주택과 근처의 다른 주택을 돌아다니며 아내와 어린 딸, 장모, 친척 네 명을 살해했다.” 월리스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리오스는 자신이 열두 살 때부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어 왔다고 말했으며, 정기적으로 로즈 힐 침례교회 예배에 참석해 왔다고 진술했다.”

물론 저는 그 일 때문에 그 교회를 비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월리스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일곱 명을 살해했습니다. 계시라는 문제를 가지고 장난하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탄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고 가서 잘못된 것을 전해줄 뿐입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충분성을 확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잘 알고 계셔야 합니다. 부자가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시죠?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다시 말해서 성경을 듣게 하라는 겁니다. 마가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신비한 계시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미 답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우리 안에 무엇이 풍성히 거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조셉 딜로우(Joseph Dillow)는 이런 간증을 합니다. “내가 초신자였을 때, 빌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빌은 환상을 보는 일을 즐겼고,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삶의 거의 모든 상황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본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인상을 주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빌은 자신이 받은 주님의 메시지를 꼭 전해야 한다면서 자정에 내게 전화를 걸었다. 빌은 40대였고, 우리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직접 와서 그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빌의 관심에 감동을 받았지만 내일까지 기다려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나 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나는 빌을 집으로 초대했다.”

“빌이 도착했을 때 빌은 눈에 띄게 흥분한 상태였다. 당시 나는 막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한 참이었다. 빌은 그 일 때문에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주님께서 내게 신학교에 가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주셨다고 했다.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데 주님께서 특별히 계시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만일 네가 신학교에 가면 네 아내는 사자들에게 먹히게 될 것이고, 너는 영원한 구원을 잃게 될 것이다.’ 꽤 무서운 말이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빌은 자신의 방언 신학이 만들어 낸 미신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빌의 삶에서는 말씀의 중심성이 사라져 버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에 따르면, 빌은 감옥에 갔다. 주님께서 빌에게 합법적으로 세워진 권위에 불복종하고 토지 이용 규정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이번 주에 할 린지(Hal Lindsey)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은사주의에 대한 제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린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사람들에게 들려줄 만한 좋은 예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그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전해드리면서 마치겠습니다. 호주에 비올라(Miss Viola)라는 은사주의자가 있습니다. 아마 들어보신 분도 계실 겁니다. 치유 사역으로 전 세계적으로 점점 더 유명해지고 있습니다. 이 비올라는 은사주의자입니다. 캐서린 컬만(Katherine Kuhlman)의 영적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스스로 주장합니다. 자신의 교회에서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답니다. 심지어 다른 누구도 다룰 수 없는 귀신들까지 내쫓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귀신 축출이 계속되는 동안 구토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모든 자리에 양동이와 수건을 놓아 두었답니다. 비올라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이 쫓아내지 못하는 귀신들까지 쫓아낼 수 있는 이유를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찾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물론 말씀을 심각하게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죠.

비올라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시절에 신앙적으로 정체된 상태에 있었는데요, 그러던 중 남편이 세상을 떠났답니다. 외로움에 빠져서 하나님으로부터 초자연적인 계시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죠. 결국 이른바 성흔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성흔이란 십자가 모양의 흔적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손바닥과 옆구리에 상처 자국이 생겨났다는 겁니다. 과거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가 경험했다고 주장한 현상이지만, 실제로 확인된 적은 없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실제로 보았다고 주장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올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들이 성흔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을 괴롭힐 수 없고, 또 어떤 귀신이든 쫓아낼 수 있답니다.

비올라의 교회는 점점 성장해서 더 큰 건물이 필요할 만큼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교회 건축 자금을 마련해야 했답니다. 그러던 중에 할 린지의 친한 친구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데 상당한 재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올라가 일행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나타났습니다. 늘 함께 다니는 한 여성과 전직 성공회 사제가 함께했는데요, 함께 다니는 이 여성은 여선지자라고 부릅니다. 비올라가 하나님께 직접 말하면 하나님이 그 여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비올라에게 응답하신답니다. 그 여성은 신적인 음성으로 말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비올라는 언제나 이 여선지자와 전직 성공회 사제와 동행했습니다.

비올라 일행이 할 린지의 친구를 찾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러 가라는 환상을 주셨는데 왜인지는 모른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할 린지의 친구가 이렇게 물었답니다. “그래서 무엇을 원하시나요?” 그러자 비올라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계시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물론 실제로는 이미 알고 있었겠죠. 할 린지의 친구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할 린지에게 전화를 걸었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LA로 가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무슨 일인지 한번 알아봐줘.” 그래서 비올라 일행과 할 린지의 친구가 비행기를 타고 LA로 갔답니다. 할 린지가 그들을 맞이했고, 모두 함께 모였습니다. 할 린지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매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답니다. 비올라에게 질문을 던지자, 자신이 가진 계시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여러 일들과 은사주의적 능력과 은사에 대해 설명했답니다. 그런데 할 린지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할 린지가 질문을 해서 비올라가 대답을 해야 할 때마다, 대화 내내 이렇게 높이 쌓인 서류 더미를 뒤적이면서 대답했다는 겁니다. 서류 더미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답니다. 뭔지 아시겠어요? 비올라가 하나님께 받았다고 주장하는 모든 계시들을 기록해 둔 문서입니다. 질문을 받으면 그 서류들을 뒤적여서 답을 찾아내서 대답한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할 린지가 비올라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하지만 당신의 대답은 성경의 가르침에 맞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비올라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잘못 해석한 것이죠.” 여러분, 바로 이것이 궁극적인 결론입니다. 권위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지 않으면, 결국에는 자기만의 문서 더미를 쌓아 두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은사주의적 계시를 추구하면 도달하는 이 종착점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앙입니다. 비극입니다. 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단호히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태초부터 이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했던 성도 욥의 편에 서겠습니다.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에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헌신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다시 한번 새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인 은사주의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들은 성경의 권위를 조금씩 놓아 버리고, 답을 얻기 위해 들여다본다고 착각하는 수많은 계시들을 쌓아 가고 있습니다. 옳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행하셨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스스로 말씀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면 어떻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두렵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사랑하게 하시고, 연구하게 하시고, 양식으로 삼게 하시고, 또 가르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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