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은사에 대해서, 또 은사가 작용하는 원리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각자의 은사로 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잘 세워지면 각 지체들은 더욱 효과적인 증인이 됩니다. 각자의 은사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 연합을 가져오고, 그 연합이 세상을 향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는 영적 은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의 은사 목록을 찾아서 하나로 모았죠. 그러면서 가장 먼저 '영구적인 덕을 세우는 은사'를 살펴봤습니다. 신자들을 세우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죠. 신자들이 서로를 섬기기 위해 사용하는 은사로써, 이를 통해 각 신자 개인이 성장하고, 이러한 성장의 결과 교회 전체가 함께 세워집니다.
하지만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가 아닌 다른 종류의 은사도 있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말씀을 확증해주기 위한 것이었죠. 이 은사들은 교회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확증하기 위한 용도였죠. 예를 들면, 세 명의 설교자가 마을에 와서 각자 다른 메시지를 전했다고 해봅시다. 여러분이 신약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누구를 믿었을까요? 아마도 기적을 행하는 사람을 믿었을 겁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기적들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던 겁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예수님의 주장을 입증한 것은 바로 기적이었습니다. 기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로써 사용되었죠.
초대교회와 사도시대에는 이런 은사들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사도들은 특별한 기적의 은사를 받았는데, 이는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자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이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의 은사는 신약성경에 총 네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표적, 병 고침,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언어와 언어 통역이죠. 헬라어에 담긴 뜻이 그렇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은사들이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은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직접적으로 표적을 보이시던 사도 시대를 위해 존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마가복음 16장을 비롯한 여러 구절들을 통해서 이 은사들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6장을 펴시는 동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전하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믿는 운동에 속한 소중한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사역하는 교회에서 설교도 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로서 함께 교제도 나누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가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고집대로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이론적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성경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입술을 지켜주셔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말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제 안에 있는 편견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얻게 된 담대함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으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그 운동에 속한 많은 분들의 구원이나 진심을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마가복음 16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4절입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제자들에게 전해졌을 때 반신반의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15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예수님은 열한 제자에게 복음을 믿는 자들을 위해서 특정한 표적이 뒤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리고는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즉 독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에게 기적이 따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말하는 네 가지 은사가 여기에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기적의 은사는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 아니겠습니까? 치유의 은사도 언급되어 있는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낫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도 나오는데,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은사는 주님께서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와 표적을 통해 믿음이 확인될 거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 당시에 주어진 모든 은사들을 여전히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애팔래치아 산맥 교회에서 독사를 직접 다루는 의식을 한다거나 장자교회같은 교파에서 독을 마시는 사람들의 주장에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대로 잘 되지는 않죠. 그럼에도 이러한 주장의 일부분을 받아들인다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말씀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에 얽매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2절을 보겠습니다. 계속해서 몇 가지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참고할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진정한 사도임을 이렇게 증명합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바울은 “사도의 표” 앞에 정관사를 사용했습니다. “모든” 표가 아니라 “특정한” 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주어진 특정한 표적들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의 표적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특별한 표적들을 받았습니다.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16장에서 언급된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 2장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름 그대로 히브리인들, 곧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이죠. 2장 3절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물론 주님께 직접 들은 것은 아닙니다.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여기서 확증했다는 것은 믿을 수 있고 참된 것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선포된 말씀이 확실해졌다는 것이죠.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4절입니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이런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은 유대인들이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이 바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먼저 말씀이 선포되었고, 그 다음에 사도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를 통해 확증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사라 불리는 특정한 영적 은사들은 오직 사도들에게만 뒤따랐던 표적이었다는 겁니다. 이런 은사들은 사도들의 초기 사역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듣는 사람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확증해 주시기 위해서 사도들에게 이런 특별한 은사를 주셨던 겁니다.
뛰어난 성경학자였던 벤자민 워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어떤 인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진술일 뿐입니다. 읽습니다. “이 기적의 은사들은 사도들의 자격 증명서와도 같았다.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 하나님께 위임받은 대리자임을 증명해 주었다. 그래서 이 은사들은 사도시대 교회에만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 시대와 함께 사라졌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말하듯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의 기초였다면, 사도의 표적들도 사도들이 떠나면서 함께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도들의 표적이 성령님의 확증하는 은사였다면, 이 모든 것이 연결됩니다. 결국 사도들이 이 땅에서 사라졌을 때, 확증의 표적으로 주어졌던 성령의 은사들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이러한 은사들을 사도들에게만 국한시키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도행전 14장 3절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 있을 때였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사들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두 사도가 말씀을 전할 때 기적을 통해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이 입증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오늘날 교회는 이런 종류의 증거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세 사람이 와서 각각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고 해도, 저는 누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누가 기적을 행하느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준일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야말로 누군가가 전하는 말씀이 참된지 확인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당부했습니다. “예언을 할 때는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누군가의 메시지나 경험, 혹은 영적인 것들을 검증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 검증이며 신앙과 실천의 최종 권위이자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누군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검증하거나 확인하기 위한 은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이미 확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적이라는 표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특히 성경이 모든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미국 사회와 교회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의 최종성과 권위를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31절이 떠오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성경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지만, 이런 기적적인 은사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와 디도에게 전한 서신을 보면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강조했습니다.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
일부 사람들이 그렇다고 주장하듯이 오늘날 이런 은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위대한 성경 교사나 성경이 없는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겁니다. 하지만 이미 성경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혀 의미가 없고, 성경적 은사와도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성경 교사들도 자신에게 이런 은사가 없다는 점에 동의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우리에게 위대한 신학 작품을 남긴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런 은사와 관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은 사도들의 사역 초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은사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히 살펴볼 수밖에 없지만, 먼저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 나오는 “능력 행함”을 보겠습니다. 은사들을 나열하면서, 바울은 “능력 행함”, 즉 기적을 행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맥아더 목사님, 기적이 이제는 없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저는 기적이 중단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적은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저도 계속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기적이 무엇인지 정의해주세요”라고 물으신다면, 사실 기적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기적에 대해 크게 놀라워하지만, 기적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작은 자연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봅시다. 연못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연못입니다. 이 작은 연못의 모든 것이 있어야 할 모습 그대로라고 해봅시다. 기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연못에 손가락을 담가서 잔물결을 일으키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위에 계시다면, 기적은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저 연못에 돌을 던지면 잔물결이 퍼져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연못은 다시 잔잔해지고 원래대로 돌아오죠. C.S. 루이스가 쓴 기적에 관한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주제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적은 그저 하나님이 연못에 손가락을 담그셔서 잔물결을 일으키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연못을 만드셨다면, 원하실 때 언제든지 손가락을 담그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적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적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합리주의자들이 성경에서 모든 기적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혼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이유입니다. 이들은 인본주의 철학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제로 기적을 행하십니다. 치유의 기적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선교사에게 자신이 모르는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방언의 은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의 은사였으니까요. 하나님은 우리 몸의 다른 부분처럼 우리의 입으로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기적을 봅니다. 가장 큰 기적은 거듭남의 기적입니다. 제가 바로 기적입니다. 저를 변화시키신 걸 보면 하나님의 능력은 정말 위대합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말이죠. “아직도 한참 남았어요.”
우리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늘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셨는데,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간증할 수 있도록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신 분이겠지"라고 말할 수 있도록 말이죠. 이것도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이미 완성된 체계인 성경의 계시를 입증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기적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의 기적은 성격이 다르고, 사도 시대를 위한 기적의 은사는 이제 끝났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의 역사를 보면 큰 기적의 시기가 네 차례 있었습니다. 그 외의 성경 시대에는 기적이 거의 없었죠. 모세 시대에 기적이 있었고,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기적이 전혀 없었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예수님의 생애와 사도 시대에 갑자기 다시 나타났습니다. 기적은 항상 특정한 목적 하에 특정한 시기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기적을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적의 은사가 사도 시대와 함께 사라졌다고 믿습니다. 독을 마셔도 죽지 않고, 여러 가지 놀라운 표적과 기적을 행하는 것은 그 시대에만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복음 전도자나 목회자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야기했지만, 기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삶을 보더라도 기적을 특별히 강조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빌립보에서 최소 2년을 머물렀지만 기적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고, 안디옥, 고린도, 데살로니가, 더베, 베뢰아 등 어느 곳에서도 기적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만큼 기적은 매우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흄 호수로 가는 길에 빈 터에 세워진 큰 텐트를 지나갔습니다. 이런 간판이 걸려 있더군요. “기적이 일어나는 집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기적이 일어납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기적이 일어난다니, 사람들을 줄세워놓고 기적 놀이를 하겠다는 건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기적의 은사는 이 시대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도들에게 주어진 은사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든 이러한 은사들은 일시적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이 완성되면서 설교자의 진정성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아닌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는 능력으로 입증됩니다. 이제는 말씀에 대한 충실함이 증거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다음으로 넘어가보겠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는 어떻습니까? 고린도전서 12장이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병 고치는 은사'는 분명히 기적적인 은사입니다. 9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그렇다고 제가 하나님이 병든 자를 더 이상 치유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걸까요?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병든 자를 고치시지만, 사도시대처럼 자기 뜻대로 모든 사람을 고칠 수 있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현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치유가 일어납니다. 야고보서를 한번 보시죠. 5장을 잠시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야고보서는 고린도전서보다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14절입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연대순으로 볼 때 야고보서는 신약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에게 가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병 고치는 은사가 교회와 관련되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는 불신자들에게 말씀을 확증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자들은 불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신자들의 마음속에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시기 위해 병 고치는 은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교인들이 병에 걸렸을 때는 서로를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제 생각에 병 고치는 은사는 사도나 선지자가 말씀을 전할 때 기적을 통해 불신자들의 마음에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만약 오늘날에도 병 고치는 은사가 있다면 그것은 소위 치유자에게 주어지지 않고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주어졌을 겁니다. 병 고치는 은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그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지, 부흥사나 특정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사도들의 사역 후기부터 이런 현상들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디모데가 아플 때 바울이 이렇게 조언했다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만일 그때 치유의 은사가 있었다면 훨씬 더 쉽게 나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또 생각해보면 디모데후서 4장에서 바울이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으니”라고 한 것도 특이합니다. 바울이 그때 기적과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면 드로비모를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약성경을 보면 이런 은사들이 신자들을 위해 사용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치유 집회를 보면 교회를 오래 다녔던 사람들, 즉 신자들이 치유를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모습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최근에 마르조 고트너의 간증을 들었는데 꽤 흥미로웠습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마르조는 모든 진실을 말했습니다. 마르조가 4살이었을 때 치유의 은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마르조의 부모님이 마르조를 무대에 세워서 치유 사역을 시작했답니다. 읽습니다. “지난주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 영화를 한번 봐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영화사에서 아버지께 연락을 해왔다고 하더군요. 제가 4살 때 아버지께서 하신 뉴스 인터뷰와 보도 자료를 영화에 쓰고 싶다고 허락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그건 가짜였고 사기였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마르조 고트너가 그 영화에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본인도 모른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 영화에서는 이 모든 게 사기였다고 밝혀졌다고 합니다. 딕 캐봇 쇼에서였는지 어디서였는지 마르조 고트너가 직접 말하기를, 그 모든 세월 동안 진짜로 육체적인 치유가 이뤄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답니다. 다만 심리적인 문제가 있던 사람들한테는 큰 도움이 됐답니다. 또 월요일 밤에 왔던 사람들이 목요일에는 또 다른 장애를 가지고 오기도 했는데, 이게 아주 흔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대학 시절에 이런 일들을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나타나는 양상을 보였죠. 그러니까 병 고침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할 때는 정말 신중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병을 고치신다고, 치유하신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의 뜻과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요즘도 하나님의 치유 사역을 한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성경에 따르면 이런 분들은 기도에 응답받는 믿음의 은사를 받은 분들일 겁니다. 하지만 병 고침의 은사는 오직 사도들 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입증하기 위해 믿지 않는 사람들, 비신자들을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완성되고 나서는 이 은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실제로 일어나는 치유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치유하시길 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8장과 13장에도 나오죠. 사탄도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사탄에게서 나와서 이런 일을 행하신다고 결론내리지 않았습니까?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고 했죠. 이처럼 사탄이 모든 것을 흉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탄과 연관지으면서 “치유하는 것은 사탄이다. 사탄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겁니다. 따라서 치유 집회에서 줄을 세워놓고 사람들을 치유한다는 말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치유의 은사가 있다면 텐트가 아닌 병원에 갔을 겁니다. 병원에 있는 불신자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면서 말씀을 확증했을 테니까요.
이 은사에 대해서는 앞으로 심도있게 계속 살펴볼 겁니다.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병 고치는 은사, 치유의 은사는 원래 신자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표적이었고, 사도들에게 주신 은사 중 하나였죠. 오늘날에도, 또 신약의 가장 오래된 책인 야고보서에서도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지니라"라고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입니다. 방언과 통역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긴 시간은 아니더라도 성경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방언의 은사가 무엇이고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킹제임스 버전 성경에서 '방언'이라고 번역된 것은 사실 '언어'의 은사라고 해야 맞습니다. 헬라어로 ‘글롯사(glōssa)’는 전통적으로 '언어'를 뜻하는 단어였고, 그 외의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이 은사는 성령님이 주신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확증하시는 표적으로 사용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핵심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설교였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 삼천 명이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전한 말씀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확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제자들이 각종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확증을 위한 은사였습니다. 불신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은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설교를 향한 표적이었습니다. 이 기적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요? 이 기적을 본 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아, 이런 기적이 있었으니 이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최소한 회개한 삼천 명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방언은 오직 유대인을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도 유대인들이었고, 10장에서도 "할례받은 신자들이 듣고 믿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전체를 보면 방언이 나올 때마다 꼭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이방인과는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방언은 유대인 신자가 누구인지를 가리키는 역할을 했고, 이방인과는 관련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 운동에서는 이방인 신자들끼리 방언을 합니다. 완전히 성경과 반대되는 것이죠.
좀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1절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이렇게 시작하는데, 구약의 이사야 28장 11절과 18장 1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여기서 "이 백성"은 이사야서의 문맥상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말하되, 다른 방식으로 말하겠다"는 뜻입니다. 원문에는 "말하는 자"라는 표현이 없고, 단순히 "다른 방언과 다른 입술로"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입술의 기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말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다른 방언과 다른 입술로 이스라엘에게 말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방언의 본질입니다. 방언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으로 "이 백성"이라는 표현은 ‘오직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22절을 보면 "그러므로 방언은… 표적이나"라고 합니다. 표적은 항상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계속해서 복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잘 보십시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방언은 애초에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방언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면서 왜곡시켰습니다. 이교도 예배에서 경험했던 황홀경 상태에서 내뱉는 중얼거림과 혼동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뒤섞어 버렸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아직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방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면서도 이 상황을 바로잡으려고 했던 겁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시켜 주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확실히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하지만 오늘날의 이 운동에서는 방언을 하지 않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마땅히 되어야 할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진정한'이란 표현은 맞지 않으니 쓰지 말아야겠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니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해야 할 것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서로에게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이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든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 안에 풍성히 거할 때, 성령 충만이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때서야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 운동이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울은 이사야 28장 11절을 인용하면서 방언이 분명히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22절을 좀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란 누구입니까? 바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여기서 예언이란 말씀 설교를 뜻합니다. 사실상 고린도 교인들에게 "여러분에게는 더 이상 경험이 아닌 교리가 필요하다"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이제 23절을 보겠습니다. 잘 이해하지 못하면 헷갈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모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방언을 했는데, 모두가 여러 언어로 말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은 진짜 언어라기보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을 텐데, 잠시 후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묻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잠깐만요,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데요.” 22절에서는 "방언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표적"이라고 했는데, 23절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들을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는 유대인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의 도시, 즉 헬라인의 도시였죠. 문제는 이방인들이 교회에 왔을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는 의도하지 않으셨기에 이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되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고린도 교회에 왔는데, 성도들 모두가 방언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희 옆집에 이방인 이웃이 살고 있는데, 저희는 그 부부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아내도 복음을 전하고 저도 전했죠. 부인이 심한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찾아가서 기도하고 복음을 또 전했습니다. 이렇게 그 부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부부는 매우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항상 가장 어렵습니다. 종교적으로 신실하고 좋은 분들이니까요.
저희는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자료도 나누고, 설교 테이프도 드리고, 기독교 방송 'Voice of Calvary'도 들으시라고 하고, TV로도 보라고 하는 등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이웃집 부인이 제 아내를 찾아왔는데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답니다. “물어볼 게 있어요. 어떤 여성이 절 모임에 데려갔는데, 그 사람들 미쳤더라고요”라고 했답니다. 아내가 좀 더 자세히 물어보니까, 그 여성은 이웃집 부인을, 신앙이 없는 이방인을, 방언 기도 모임에 데려갔던 겁니다. 이웃집 부인은 거기서 모든 것이 틀렸다고 결론을 내렸답니다. 결국 저희가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닫혀버렸습니다.
이웃집 부인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교회에 다니니까 저희 부부도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부인이 우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방언은 원래 이방인을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특정한 시기에 유대인에게 주신 특별한 표적이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점을 기억하십시오. 방언이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명백한 사실입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후 70년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리시고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끊으신 뒤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셨을 때, 그 사실만으로도 방언은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표적을 주시는 일을 하지 않으시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일시적으로 어떻게 하셨나요? 한쪽으로 제쳐두시고 눈을 가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표적들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향한 표적으로서의 방언도 중단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표적으로서 중단되었다면 방언 역시 중단되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진리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은사가 문맥에서 벗어나 지나치게 높임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20절이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아이가 된다는 것은 주어진 목적은 제쳐두고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은사,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설계하셨습니다. 항상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었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고, 항상 유대인 불신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에서 방언이 등장할 때면 언제나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유대인들이 없었기에 방언을 하는 것이 책망을 받았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고린도에 방언을 허락하신 것은 상업 중심지였던 고린도를 오가는 많은 유대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고린도에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 유대인들로 인해서 고린도에도 표적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을 위해 방언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언은 크게 왜곡되었는데, 특히 신탁에 익숙했던 고린도 교인들이 황홀경에 빠진 중얼거림을 예배에 들여왔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최근에 역사를 연구한 결과, 고린도인들이 황홀경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신들의 언어”라고 부르는 것을 교회로 끌어들여서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겁니다. 바울은 사랑으로 이 문제를 바로잡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방언은 항상 실제로 존재하는 언어였습니다.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외국어였을 수 있지만, 분명히 실제 사용하는 언어였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글롯사(glōssa)’는 '언어'를 뜻하는데, 여기에는 구체적인 언어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바로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포타미아 사람들, 이집트인, 구레네인, 아라비아인들의 언어입니다. 이렇게 정확히 어떤 언어들이었는지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게네 글롯사(gene glossa)’라는 표현도 사용하는데, 이는 ‘여러 종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는 ‘종(genus)’의 어원이 되는 ‘게네(gene)’, ‘게노스(genos)’는 다양한 종류의 언어를 의미합니다. 의미 없는 소리에는 종류가 있을 수 없죠. 의미 없는 소리는 그저 의미 없는 소리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는 분명 실제 언어, 다양한 언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방언 통역의 은사"를 뜻하는 ‘헬메네이아(hermēneia)’는 "언어 번역"을 의미합니다. 실제 언어였다는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7절을 보면 바울은 언어에 문법적 구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그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방언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했기에 바울이 "그것은 구별할 수도 없고, 진정한 것도 아니며, 통역조차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들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현대 언어학자들의 관점을 통해서 오늘날의 방언 현상이 실제로 언어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한 전문가의 증언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논할 점이 참 많습니다. 윌리엄 사마린(William Samarin)이라는 교수가 최근에 <사람과 천사의 방언>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사마린 교수는 언어학 전문가로, 평생을 언어학 연구에 헌신한 언어학 박사입니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언어학 교수입니다. 미국의 러시아계 몰로칸 공동체에서 자란 사마린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방언을 접하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로 마음먹고 평생의 연구 주제로 삼았습니다.
사마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몇 년에 걸쳐 나는 이탈리아, 네덜란드, 자메이카, 캐나다, 미국 등 여러 나라의 방언 모임에 참석했다. 전통적인 오순절교도들과 196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오순절교도들을 모두 관찰했다. 작은 가정집 모임부터 대규모 공개 집회까지 다양한 모임에 참석했고, 브롱크스의 푸에르토리코인들, 애팔래치아 산맥의 뱀 부리는 사람들, LA의 러시아계 몰로칸인들, 자메이카의 포코마니아교도들 등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수많은 방언을 녹음해서 분석했다. 모든 사례에서 예외 없이 방언은 언어학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언어와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방언은 실제 언어가 아니다.” 언어학 전문가의 증언입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질문을 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오늘날 이런 일을 하실 수 없다는 건가요? 진짜 방언은 있을 수 없다는 건가요?"라고 물으신다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듯 거짓말 외에는 하나님께서 못 하시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해보시죠. 위급한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에게 모르는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싶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방언의 은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에 행하신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언어였고, 단순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전해질 때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초자연적인 표적이었습니다. 참된 방언은 항상 실제 언어였고,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었으며, 특히 유대인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자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는데, 이 점이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신자들끼리 모여서 방언을 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본래 목적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을 어떻게 남용했나요?” 앞으로 언젠가 고린도전서를 공부하면 알게 되겠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다른 모든 것들을 남용했던 것처럼 방언도 남용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남용했다고 할 수 있죠. 고린도 교회는 정말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분열되었고, 육신적이었고, 성적으로 문란했고, 신자들끼리 고소했고, 신자의 몸을 잘못 사용했고, 결혼 관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순결의 의미도 몰랐으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용하고, 여자들은 복종하지 않았고, 성찬식도 잘못 행했고,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몸이 부활한다는 것조차 부인했습니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인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14장을 보면 영적 은사의 영역에서 혼란이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는데,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편지를 써서 이러한 남용을 바로잡고자 한 겁니다. 14장의 몇 가지 내용을 보면, 1절에서는 "사랑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모든 은사는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데, 사랑이 아닌 분열을 일삼고 육신으로 섬겼기에 진정한 은사가 아니었습니다.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라는 것은 함께 모일 때 하나님이 은사를 통해 역사하시길 바라라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은, 3절을 보면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말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2절에서 말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영으로 비밀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가르치고 전파하려면 공부해야 하는데, 이를 통해 영적 진리를 얻고 성장하게 됩니다. 4절에서는 "자기의 덕을 세울 뿐"이라고 했는데, 이는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지금도 이런 이기심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기적이면 안 됩니다. 영적 은사를 진정으로 사용하려면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영적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지, 나를 세우거나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닙니다. 나만을 위해 영적 체험을 만들어내는 것은 가장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의 덕을 세우는 것은 정말 복된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방언의 은사는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27절에서 몇 가지 자격 조건을 두셨습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당시 방언이 무분별하게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둘이나 셋으로 제한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께서 이 은사를 부어주실 때, 그 자리에는 이 은사가 필요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둘이나 셋이 한 번에 한 사람씩, 통역자와 함께 해야 했습니다. 28절을 보면 통역자가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앉아서 기도만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바울은 3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 말씀을 고수한다면 은사주의 운동의 75%는 내일이면 사라질 겁니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너무 많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여성들이 방언을 지나치게 제멋대로 사용했던 겁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바울은 방언의 사용에 대한 매우 엄격한 규정을 두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그 의미를 분명히 보여줬죠. 방언은 유대인들, 특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위하는 것을 중단하셨을 때, 이스라엘을 향한 표적도 함께 중단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표적이었기에 이 은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이로 인해 큰 혼란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중단된 은사가 있었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우리의 신학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은사에는 일시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13장 8절을 통해 또 다른 관점을 살펴보겠습니다. 8절에서 시작하면 좋을 것 같네요.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그렇다면 이제 떨어지는 것, 폐할 것과 비교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언도 ‘카탈게오(katargeō)’할 것이며," 즉 폐할 것입니다. "방언도 ‘파우오(pauō)’될 것이며," 그칠 것입니다. "지식도 폐하리라." 여기서 바울은 예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할 때 동일한 단어인 ‘카탈게오(katargeō)’를 사용했습니다. 효력을 잃거나 대체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언과 지식은 새로운 것으로 바뀔 것입니다. 모든 예언과 지식이 완전한 지식으로 대체되는 때가 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방언은 어떤가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방언은 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를 말하는 9절부터 13절에는 방언이란 말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방언은 이미 그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이 있다 해도 '파우오(pauō)'될 것이다." 이 단어는 능동태로 쓰면 '그치게 하다'라는 뜻이고, 수동태로는 '저절로 그치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즉 방언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정말 흥미롭습니다. 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방언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고 예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절은 이 둘에 대해 계속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방언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방언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방언이 유대인을 위한 은사였다면, 주후 70년경에 중단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하신 때이죠. 헬라어를 자세히 보면 바울이 특별한 단어를 선택했는데, 이를 쉽게 말하면 "방언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없어진다는 말이지요. 이해가 되시나요? 바울은 다른 동사와 다른 태, 다른 시제를 써서 다른 의미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정말 언제 사라졌나요?"라고 궁금해하실 수 있는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적어도 주후 70년이 그 시작이었을 것입니다. 달라스 신학교의 조지 달러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 35년 전, 콜게이트 대학의 저명한 교육자 조지 커튼 박사는 방언의 역사적 사례들을 깊이 연구했다. 연구 결과 초대교회, 즉 교부시대에는 실제로 방언을 했거나 심지어 방언을 하는 척한 사람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초대교회, 즉 교부시대에 실제로 방언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전혀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바울이 예언했던 것처럼 방언은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현대의 방언 운동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 클레온 로저스도 이 주제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읽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인 100년에서 400년까지의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기록들을 살펴본 결과, 1세기에 있었던 기적적인 은사들은 그 이후로 사라졌다. 교회의 첫 400년의 역사에서 그런 은사들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초대교회에도 몬타누스와 터툴리안이 있었잖아요"라고 말이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몬타누스는 이단이었고, 귀신 들렸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만 말씀하시고 성령도 자신에게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고, 터툴리안은 몬타누스의 추종자였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카톨릭 신자들이 방언을 했습니다. 최초의 현대 미국 종파는 쉐이커교인데, 그들은 독신생활을 했고 공산주의적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들의 지도자 마더 앤 리는 자신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몰몬교 신앙고백 제7조에서 방언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몰몬교의 일부라고 할 수 있죠. 현대적 의미의 방언 운동은 1914년 아주사 거리 집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점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방언이 주후 70년경이나 1세기 말에 사라졌다가 1,800년 넘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일어나는 현상들을 진짜라고 믿어야 할까요? 성령님이 교회에서 1,800년 동안이나 이 중요한 은사를 거두어가셨다는 말일까요? 성경 어디에도 이 은사가 다시 주어질 거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게 정말 교회 생활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면, 지난 1,800년 동안 왜 사라졌던 걸까요? 성령님께서 이런 큰 실수를 하실 리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날 일어나는 이런 현상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이에 대한 설명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로, 일부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떤 분들은 방언에 정말 진심이고 진실하며 이것을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절대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평가하는 관점에서 정확하게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우선, 일부는 그냥 가짜입니다. 완전히 가짜죠.
제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설교하고 있을 때 한 여성분이 갑자기 일어나서 중간에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교 학생이었고 젊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말했죠. "주님은 아마도 우리가 한 번에 한 사람씩 말하기를 원하실 것 같습니다. 예언이 더 큰 은사이니 지금은 앉으시고 나중에 하시면 어떨까요?" 그때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정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는데, 중요한 건 그 여성분이 그냥 바로 멈추고 앉았다는 겁니다. 그냥 딱 멈추더니 앉았습니다. 만일 그게 진짜 성령의 역사였다면, 제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쉽게 멈추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마린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언을 중얼거리는 건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 방언 운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인 브레데센이 쓴 방언 지침서를 보면 "그냥 '바바바'를 최대한 빨리 반복해서 말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하나님은 아기 말투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바울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기도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그런 이상한 말로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행위의 일부는 단순히 꾸며낸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영적 체험을 너무 갈망한 나머지, 또는 주변 사람들의 압박감 때문에 그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고, 점차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심리적인 현상이라고 봅니다. 기독교와 전혀 관계없는 여러 집단들도 역사적으로 이런 행위를 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심리적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최면 상태로 만드는 것이죠. 결국 대부분이 심리적인 현상인 것입니다.
또 이 중 일부는 사탄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실제로 마귀가 말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는 것만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8장 19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뭔가 특별한 초자연적 경험을 찾고 있었고, 결국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마귀를, 속삭이고 중얼거리는 마귀를 얻었죠. 70인역에는 헬라어 '에가스트리무투스(eggastrimuthous)가 쓰였습니다. '복화술사'라는 뜻이죠. 마귀들은 사람을 흉내낼 수 있습니다. 복화술을 하는 마귀들이 있다는 겁니다.
지난주 신문을 보니까 누군가가 파이크 박사와 대화를 나눴다고 하는데, 불가능한 일입니다. 파이크 박사는 이미 오래 전에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대화를 나눈 것은 파이크 박사처럼 보이는 마귀였을 뿐입니다. 마귀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진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경험은 반드시 성경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합니다. 어떤 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잊고 조용히 있으십시오. 그저 그리스도께 집중하고 확신을 가지고 소리를 내면 주님께서 그 소리를 받아 언어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마음으로 기도하며,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방언을 추구하는 걸까요? 왜 이렇게 하는 걸까요? 간단히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체계적인 성경 해석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무엇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모르는 거죠.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곧 그럴 거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재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스라엘과 교회의 차이점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는 이 지역의 신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신학적 관점 없이 성경 전체를 떠돌아다녔습니다. 모든 것을 그저 영적으로 해석해서 뒤섞고는 하나로 만들어 버렸죠. 그러다가 "결정했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는 정말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모든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기로 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럼 각종 제사는 몇 시에 드리실 건가요?"라고 물었습니다. 모든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순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시대에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신학적으로 어떤 내용이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은사주의자들 중에도 독극물을 마시지 말아야 하고 뱀을 갖고 놀아서는 안된다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그래서는 절대 안됩니다. 체계적인 성경 해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잘못된 길로 빠지기 때문입니다.
둘째입니다. 사람들이 은사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초자연적인 체험에 목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안쓰럽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 모든 것이 우리 것이 되니까요. 이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습니다. 삶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무엇이든 붙잡으려 합니다. 이 문제의 책임은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자들에게 있습니다.
셋째입니다. 많은 분들이 물리적 느낌과 감정적인 체험을 갈구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이 없기에 계속해서 뭔가가 눈에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만큼 믿음이 약한 것이죠. 증거를 찾으려는 의심일 뿐입니다. '초자연적인 것을 보여주면 그때 믿겠다'면서 계속 뭔가를 찾고 있는 겁니다.
넷째입니다. 사람들이 방언을 추구하는 것은 이런 체험들이 마치 영성의 지름길처럼 제시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 영적으로 금방 성장할 수 있고, 자연스레 높은 차원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오늘날의 이런 움직임들이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체험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육신과 사탄도 거짓된 체험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도 꼭 기독교인들만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체험들이 진리를 증명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전 11년에 시리아-페니키아 해안의 비블로스에서 방언 현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주전 429년부터 347년 사이에 기록된 플라톤의 대화록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오고, 주전 7년부터 19년 사이에 기록된 로마 시인 버질의 <아이네이스(Aeneid)>에는 델로스 섬의 시빌 여사제들이 이런 종류의 황홀경 상태에서 말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크리소스토모스가 기록한 델피의 무녀도 이런 현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신비종교나 그리스-로마의 종교의식에서도 이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건 아주 오래된 현상입니다. 무슬림들 중에서도 이런 걸 볼 수 있는데, 오늘날 페르시아의 수피교도들은 알라의 이름을 부르면서 몸을 격렬하게 떨고, 빙빙 돌면서 황홀경에 빠져 알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린란드 에스키모들의 종교 의식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의술인이자 사제인 ‘앙게콕’이 의식을 이끄는데, 춤을 추고 옷을 벗어 던지고 광란적인 행동을 하면서 이상한 말을 합니다.
피터 프뢰이켄(Peter Freuchen)은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린 <북극 탐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갑자기 크뤼숙이라고 하는 한 남자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의식의 일정한 리듬을 따르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더니 까마귀처럼 울고 늑대처럼 울부짖었다. 황홀경에 빠진 그와 이발루라는 소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정말로 방언이란 게 있다면 그때 들었을 것이다."
또한 방언은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티베트 승려들도 방언을 합니다. 실제로 티베트 승려들의 사례를 기록해보면 악마적인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승려들이 영어로 대화를 하고, 어떤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영어로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독일어로 프로이트를 인용하는 승려들도 있었는데, 악마적인 활동으로 여겨졌습니다.
모든 것은 성경의 기준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현대에 일어나는 이런 운동의 문제점은 성령 세례에 대한 교리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성령보다 낮은 존재로 취급합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즉 상위 그룹과 하위 그룹으로 나누어버립니다. 이로 인해 잘못된 연합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요한계시록 17장에는 하나의 세계 교회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신학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지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교파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3만 명의 카톨릭 신자들이 은사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만 8백만에서 천 4백만 명이 이 운동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교파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교리에 상관없이 모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험을 했다면 어떤 교리를 가지고 있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계시록에 예언된 거짓 교회를 낳게 될 에큐메니칼 운동, 세계 교회 운동의 촉매제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후서 1장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꼭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하는 겁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무엇을 주셨다고 합니까? 일부만 주셨나요? 아닙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그 순간, 이미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다른 무언가를 더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고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 중에서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단 하나의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이 이미 가진 것들에 얼마나 순종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이러한 진리들을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였기에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많은 분들이 이 운동에 속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을 사랑 없이 불공평하게 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성경을 올바르게 나누고자 힘썼습니다. 저는 이 양떼의 목자로서 양들을 위협하고 연합을 해치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함을 훼손하려는 자들로부터 보호하고 지켜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느낍니다.
따라서 성령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으며 이 말씀들을 전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신실함과 순종으로 섬기기 전까지는 만족하지 않게 하소서. 성경 말씀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또한 말씀을 배우기 위해 모인 이들로 인해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아침 예배를 마친 후 우리 모두는 우리가 배운 것을 나누기 위해 보냄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한 특별한 곳을 예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의 의문들을 풀어주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분들을 대할 때는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했던 것처럼 강하게 나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다가가십시오. 성경적 원리들을 나누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제게 맡겨진 양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리들을 나눌 때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일, 곧 사랑이 없이 은사를 사용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반드시 사랑을 가지고 나누셔야 합니다. 한번 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귀한 분들과 주님께서 택하신 모든 영혼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우리의 사역을 더욱 풍성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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